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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상교우서』

조선인 신학생들을 어디에서 교육할 것인지?

2021년 5월호(통권 72호) / 발행일 2021.4.20

 

조선인 신학생들을 어디에서 교육할 것인지?

 

  지난 호에서는 모방 신부가 전하는 김대건 신부의 가족과 고향에 관해 소개해드렸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소년 김대건을 포함한 조선인 신학생 3명을 사제로 양성하기 위해 어디에서 교육할지 고심했던 모방 신부의 서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소년 김대건이 조선을 떠난 1836년 12월 당시에는 조선인 학생들이 신학교육을 받을 지역도 학교도 미정인 상태였습니다. 모방 신부가 이 결정을 마카오에 위치했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의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위임하였기 때문입니다.

 

“착실한 본국인 사제가 있다면 (유럽인보다 발각될 위험이 덜하니) 조선에 박해가 일어나더라도 신앙이 보존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어디로 보내야 좋을지?”

 

  신학생들을 파견하기 8개월 전인 1836년 4월 4일, 모방 신부는 극동대표부 대표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서한을 씁니다. 돌아오는 12월에 신학생 2~3명을 마카오의 극동대표부로 보내겠으니, 이 학생들을 교육할 시설과 지도자들을 찾아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서한은 1년 뒤인 이듬해 4월에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도착하고, 다시 2개월 뒤인 6월 7일에는 소년 김대건과 최양업, 최방제가 마카오의 극동대표부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서한을 작성한 같은 날 모방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지도신부들에게도 긴 서한을 썼습니다. 이 서한에서 모방 신부는 조선인 사제 양성에 관해 자신의 의견을 전합니다. 모방 신부가 조선에서 신학생 교육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조선에서 곧 박해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습니다. 박해가 일어날 경우 전국적으로 큰 피해가 있을 것이며, 그 경우 신학생들이 받을 피해는 불을 보듯 명확했습니다. 또한 신학교육을 한다면 10여명의 학생들을 모아두어야 하겠지만, 그만큼의 학생들을 한 집에 모아놓는 것도 어렵고, 자신이 신학생 교육에 필요한 만큼 시간을 충분히 들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모방 신부는 조선과 가까운 요동에도 조선인 신학교를 세울 수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신학생들이 요동에 머물게 된다면 라틴어 공부에 앞서서 중국어도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학업 과정이 더 힘겨워질 우려가 있었습니다. 또한 요동 지방에는 조선인들이 많이 다니기 때문에 조선인 소년들이 유럽인들에게 신학교육을 받고 있다는 소문이 금방 널리 퍼질 수 있고, 그렇다면 조선에서 박해가 일어나게 될 것이며, 최악의 경우 일본에서처럼 교회 재건이 불가능하게 될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했습니다. 조선인 신학교의 존재가 알려지게 된다면 요동의 교회까지 박해를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모방 신부는 “마닐라, 싱가포르, 페낭 외에 다른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라고 썼습니다. 그러나 결국 르그레주아 신부의 판단에 따라 ‘조선인 신학교’가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 세워졌고, 소년 김대건은 이곳에서 사제가 되기 위한 과정을 정식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정혜정 마리나(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