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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etc.

샤스탕 신부 서한

기해박해 180주년인 2019년을 맞아 간행되는 《샤스탕 신부 서한》은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신자]을 사랑하는 신앙으로 주님과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성인 샤스탕 신부님을 기억하고 현양하는 기념비의 역할을 할 것입다. 동시에 서한 자료를 통해 샤스탕 신부님의 사목활동과 한국 천주교회 역사에 대해 좀 더 깊은 연구가 가능해 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선교사제서한 대역총서’ 제1책으로 간행되는 《샤스탕 신부 서한》를 필두로 수원교회사연구소는 앞으로도 교회사적으로 가치 있는 선교사제의 서한이나 기타 외국어 문헌, 저서 등도 번역하여 간행할 예정입니다.

 

내용

샤스탕 신부님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제로서 프랑스를 떠난 후부터 순교하는 순간까지 사목활동을 하는 선교지에서는 물론 선교지로 가는 여행 중에도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나 마카오 극동대표부,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 극동대표부로 많은 보고서를 보냈으며, 가까운 동료 선교사제나 가족, 지인에게도 많은 서한을 보냈습니다.

이와 같이 직접 작성한 서한들을 통해 샤스탕 신부님의 사목활동과 신앙의 면모를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파리외방전교회가 담당하던 선교 지역의 상황과 해당 선교사제들의 활약상, 특히 1830년대 조선대목구의 사정과 1839년 박해가 진행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샤스탕 신부님의 서한이 갖는 교회사적 가치는 높습니다. 또한 1830년대 동아시아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한국천주교회사와 세계교회사를 연구하는 작업에도 더없이 귀중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수원교회사연구소는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수집 정리한 샤스탕 신부님의 서한 육필본과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문화위원회에서 작업한 판독본을 바탕으로 한국천주교회와 관련된 샤스탕 신부 서한 중 중복된 서한을 제외한 총 42통을 뽑아 새로 판독하고 번역·주석했습니다.​

 

샤스탕 신부 소개

샤스탕[Chastan, 鄭, 1803~1839] 신부님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조선대목구 선교사제이시며 순교성인이십니다. 프랑스에서 1803년 10월 7일에 출생했으며, 1826년 12월 23일 서품되었습니다. 신학생 때부터 선교 사제를 희망했던 신부님은, 1827년 1월 13일 파리외방전교회로 입회하게 됩니다. 수련 기간을 거친 후 1827년 5월 프랑스를 떠나, 1828년 7월 19일 마카오 대표부에 도착하게 됩니다. 샤스탕 신부님은 조선 선교를 원했지만, 대표부의 지시를 따라 1829년 1월에 페낭신학교 교수로 부임하게 됩니다.

 

페낭에 있을 때 조선 선교를 지원하여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허락을 받았고, 1833년 5월 페낭을 떠나 조선으로 향하게 됩니다. 1834년 6~7월, 1차 조선 입국이 실패한 후 중국 산동 지역에서 2년 간 사목활동을 했습니다. 먼저 조선에 입국한 모방 신부가 보낸 조선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1837년 1월 1일 조선 입국에 성공하게 됩니다. 입국 후 주로 강원과 충청,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 공소를 방문하며 사목활동을 했습니다. 여름에는 서울에 머물며 모방 신부와 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를 돕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지방으로 피신했고, 박해 종식을 위한 앵베르 주교님의 권유로 모방 신부님과 함께 9월 6일 자수하여 붙잡혔습니다. 1839년 9월 21일[음 8월 14일]에 동료 선교사제인 앵베르 주교님, 모방 신부님과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아 순교하게 됩니다. 이후 선교사제의 시신은 신자들에 의해 수습되어 안장되었습니다. 샤스탕 신부님은 동료 선교사제,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시복시성 절차를 거치게 됩니다. 1925년 7월 5일에 복자가 되었고(시복), 1984년 5월 6일에 성인이 되었습니다(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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