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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상교우서』

신자들의 증언 속에 드러나는 김대건 신부 ②

2021년 5월호(통권 72호) / 발행일 2021.4.20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특집] 

신자들의 증언 속에 드러나는 김대건 신부 ②

 

  저번 호부터 신자들의 증언이 그대로 담겨져 있는 ‘시복재판록’[2011~2012년 수원교회사연구소에서 간행한 대조역주본]을 바탕으로 김대건 신부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김대건의 신학생 선발과 중국[마카오] 유학

 

  김대건 신부의 어린 시절을 포함해서 그가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유학 간 사실에 대해서는 증언 기록이 많지 않습니다. 신학생 파견 자체가 선교사제와 일부 신자들이 은밀히 주관한 일이었기 때문에 일반 신자들이 자세한 내막을 알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유학 장소에 대해서도 막연히 타국(他國)으로만 알고 있는 신자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김대건 신부의 유학에 대해 진술한 12명의 신자 중 절반만이 중국(中國)으로 유학 갔다고 증언했습니다.

 

성 모방 신부 부조상(구산성지 성당)

  김대건의 어린 시절에 대한 증언은 신학생 선발과 연결되어서 확인됩니다. 시복재판 81회차 증인 김 프란치스코와 95회차 증인 서 야고보, 97회차 증인 이 베드로, 100회차 증인 최 베드로, 102회차 증인 이 마리아는 김대건이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총명했기 때문에 신학생으로 뽑혔다고 증언했습니다.
  조선천주교회의 파발꾼으로 변문과 북경을 왕래했던 김 프란치스코는 1836년 ‘노(盧)’ 모방 신부가 입국하자마자 학동(學童, 신학생)을 뽑아 유방제(劉方濟, 본명 余恒德) 신부가 중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같이 보냈다고 좀 더 상세하게 증언 했습니다. 증언자 이 베드로와 최 베드로, 이 마리아도 모방 신부가 김대건을 신학생으로 뽑았다고 진술했습니다. 최양업 신부의 제수인 이 마리아는 모방 신부가 김대건과 함께 최(양업) 토마스도 신학생으로 뽑아 타국으로 보냈다고 진술에 덧붙였습니다.

 

김대건 신학생의 조선 입국 시도 (1842년 12월 말~1843년 1월 초)

 

  시복재판에 나온 증인들은 대부분 김대건의 신학생 선발과 유학에 대해 언급한 다음 바로 그가 사제 서품을 받고 조선에 입국한 사정을 진술했는데, 파발꾼 김 프란치스코와 최양업 신부의 동생인 최 베드로 두 사람만은 김대건이 혼자서 변문을 통해 조선에 입국하려다 실패한 사실을 증언했습니다.
  김 프란치스코의 증언에 따르면, 그 자신이 연행사의 일행으로 변문에 다다랐을 때 김대건과 만났습니다. 당시 김대건은 같이 조선으로 나가기를 간청했지만, 영접 준비도 없고 위험했기 때문에 김 프란치스코는 못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이후에 김대건이 혼자 의주까지 왔다가 잡힌 뻔하고 도로 요동으로 귀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김대건 신부의 1843년 1월 15일자 서한에도 거의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다만 1884년 당시 김 프란치스코의 증언에는 몇 가지 사실과 다른 점이 확인됩니다. 김 프란치스코는 계묘년(1843) 동지달[음력 11월]에 김대건을 만났고 당시 김대건이 부제였다고 했지만, 둘이 만난 것은 1842년 말이고 당시 김대건은 신학생 신분이었습니다. 대략 40년 전의 일을 회상하면서 김 프란치스코의 기억에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김대건이 단독으로 의주로 들어왔다가 되돌아간 시기는 1843년 1월이고, 최양업과 같이 부제 서품을 받은 것은 1844년 12월입니다.
  최 베드로의 증언도 이와 비슷한데 김 프란치스코의 반대에 부딪히자 김대건이 혼자 압록강을 건너 의주까지 와서 숯막에 자러 들어갔는데 순찰하는 포교에게 잡힐 뻔한 것을 모면하고 중국으로 돌아왔다는 내용이 덧붙여 있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증언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석원 프란치스코(연구실장)